AI 이후로 저는 기술 블로그를 보지 않습니다.
지난 1년간 급격한 AI Agent 의 발전에 따라, 저는 기술 블로그를 읽는 일이 크게 줄었습니다.
지난 8년간 개발자로 일하면서 기술 블로그를 가장 많이 참고했던 저에게도 아주 큰 변화입니다.
저는 꾸준히 개발 공부를 해왔습니다. 기술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공부 하기도 했지만 (Bottom-Up), 공부의 80% 이상은 당장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술 관련 서적과 세미나를 부지런히 찾아 보았습니다. 경험이 쌓인 뒤로는 공식 문서를 즐겨 읽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참고했던 것은 기술 블로그입니다.
기술 블로그에는 책, 세미나, 공식 문서와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정확성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저와 비슷한 문제를 겪은 개발자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스스로 검증할 수만 있다면, 다른 개발자의 경험과 의견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해외 빅테크의 기술 블로그는 신뢰할만한 양질의 포스팅이 많았고, 2020년 무렵부터는 네이버와 토스 등 국내 기업의 기술 블로그에서도 다양한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개발 현장의 경험과 오픈소스 등 기술의 소비자로서의 평가를 무료로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AI 가 등장하면서 저의 공부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기술 블로그를 검색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AI 에게 작업을 맡기기 전 spec을 정하고 plan 을 세우는 과정에서도 AI 를 활용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찾고 검증하는 일까지 AI 에게 일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제대로 기술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AI 시대, 개발자의 역량은 여전히 중요
AI Agent의 코딩 능력에 대한 기대는 높습니다. 마케팅과 언론에서 보면 AI 는 만능으로 보이며, 비개발자도 누구든 충분히 코딩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AI Agent 덕분에 코딩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AI Agent가 제안하는 설계와 구현 방법을 언제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AI Agent 와 사양(spec)을 정하고 구현 계획(plan) 을 세우다 보면 AI Agent 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게 맞아?”
“그렇게 구현하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AI Agent가 제안한 계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다시 검토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AI는 검토 요청을 받은 뒤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고 해결책도 다양하지만, 결국 근본적으로 AI Agent 의 생산성은 개발자의 역량에 달렸습니다.
정보를 얻기 쉬워진 지금, 개발자의 역량을 키우려면 수많은 정보를 최대한 온전한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AI 가 돌아가는 동안, 저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며 AI 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AI 가 제공한 정보를 온전한 제것으로 만들어봅니다.
AI, 개발자 커리어의 새로운 국면
최근 팀장이자 멘토로서 개발을 가르쳐 온 팀원들과 1:1 면담을 했습니다. 모든 면담에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AI 아래 당신과 나는 모두 평등한 개발자 나부랭이이므로 더이상 멘토 노릇을 하지 않겠습니다. 궁금한건 AI 에게 먼저 물어보십시오”
물론 개발자의 역량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팀원들에게 전달하던 기술 지식의 상당 부분을 이제는 AI에게서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팀원들보다 더 오래 일했다는 사실만으로 멘토 노릇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AI 시대에 개발자의 커리어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지금까지 개발자의 커리어는 어떤 분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경험을 쌓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특정 기술을 오랫동안 다루었다는 사실은 그 분야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갖추었다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특정 기술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차별성을 만들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개발자의 커리어만으로는 개발자의 모든 역량을 보여주기 어렵습니다. 어떤 프로젝트와 기술에 대한 경험이 있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까지 충분히 드러내기는 어렵습니다.
기술 블로그는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경험 그 자체가 아닌 경험 속에서의 디테일을 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I 가 기술 지식에 접근하는 문턱을 낮춘 지금, 저는 제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뿐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는지를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AI 시대의 커리어 준비의 해답입니다.
AI, 기술 블로그 글의 정확성을 검증할 수 있다.
여태 저는 기술 블로그를 자신 있게 쓰지 못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글을 써두고도 지우곤 했습니다. 제 글이 정말 정확한가?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글을 쓰지 못하면 창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글을 비공개로 써두고는 나중에 제대로 검증해야지 하고 미뤄두곤 했습니다.
이제 AI 덕택에 제 글을 검증하는 것이 무척 쉬워졌습니다. 기술 블로그 글을 쓰며 글 뿐 아니라 제 생각이 정확한지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글을 쓰고 검증하는 과정에서도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결 든든합니다.
AI, 결국 기술 블로그가 필요하다.
AI의 등장으로 기술 블로그를 읽는 일은 줄었지만, 역설적으로 AI의 발전에도 양질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LLM의 학습에는 사람이 작성한 다양한 문서가 활용될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고 검증한 내용을 기술 블로그에 정리해 공개한다면, 다른 개발자뿐 아니라 미래의 AI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I 시대 이전에는 제 글을 직접 찾아 읽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제 글이 AI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가능성도 생겼습니다.
기술자로서, 제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정리하는 일이 저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즐겁습니다.
그런 기쁜 마음으로 기술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